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글린카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804년 6월 1일(구력 5월 20일) [[로마노프 왕조]]시대 스몰렌스크(Смоленская губерния) 노보스파스코예 셀로(Новоспасское село)에서 군인출신의 부유한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. 6살까지 할머니 손에서 길러졌고, 10살부터 [[피아노]]와 [[바이올린]]을 배우기 시작했다. 13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음악을 배웠다. 1822년까지 [[상트페테르부르크]]의 학교를 다니며 졸업한 후에도 1830년까지 머물면서 [[피아니스트]]나 [[가수]]로 삶은 이어갔다. 그의 초기 작품들은 본능적으로 민속음악의 멜로디가 스며있다. 1830년에 [[이탈리아]]로 간 그는 3년동안 머물면서 벨리니와 [[도니제티]]를 만났지만 이러한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맘에 안들었는지 [[베를린]]으로 가서 지그프리트 덴으로부터 제대로 된 정규 작곡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.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글린카는 얼마후 결혼했다. 1835년부터는 그의 첫 [[오페라]]인 《차르에게 바친 목숨(Жизнь за царя)》 작곡을 착수했다.[* [[혼란 시대]] 당시 차르 [[미하일 1세]]를 잡아 죽이려던 폴란드군을 농부 이반 수사닌이 유인하여 미하일 1세를 구하고 자신은 희생한 전설상의 일화를 극화했다.] 이 작품은 당시 [[차르]]였던 [[니콜라이 1세]]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다음해 궁정악장으로 임명된다. 이혼 때문에 살짝 휘청인 다음에 글린카는 두 번째 작품인 《루슬란과 류드밀라(Ruslan and Lyudmila)》를 완성했으나 흥행에 실패했고 글린카는 1844년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떠났다. 거기서 [[엑토르 베를리오즈]]와 친분을 맺고 이어 [[스페인]]등을 여행한다. 1848년에는 [[바르샤바]]에 머물면서 [[오케스트라]]를 위한 《카마린스카야(Kamarinskaya)》를 작곡하였는데 이는 [[차이코프스키]]와 [[러시아 5인조]]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. 그 후에 다시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갔다가 선생님이었던 덴을 만나러 [[베를린]]으로 갔으나 1857년 2월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